[SOH]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중국군이 학생과 시민들이 주축이 된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한 ‘톈안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이 날, 톈안먼 광장에 모인 비무장 시민들을 전차로 무차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권에 영향을 주는 ‘민감한’사건으로 검열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젊은이들은 문화 대혁명처럼 이 사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톈안먼 사건 체험자들은 사진과 책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전 중국 정법대(法政大) 강사 우런화(吴仁华) 씨는 2007년 대만에서 ‘피로 물든 톈안먼의 내막’을 출판한 바 있고, 현재 ‘6·4 사건의 첫 번째 전차 사단’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우 씨의 책에는 진압명령을 받은 전차군단이 톈안먼 광장에 진입해 대학살을 전개할 때까지의 자세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사건 당시,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베이징에 20만 이상의 군을 투입했습니다. 이중에는 제38집단군(集団軍)의 전차 제 6사단과 톈진 경비구역 전차 제1사단이 소집됐습니다.
6월 4일 새벽 6시 5분, 경계부대 사령부에서 출동 명령을 받은 전차 제1사단이 신화문(新华门) 부근에 몰려있는 학생들을 해산시킨 후, 8대의 전차가 4열로 전진했습니다. 당시 장안가의 서쪽 약 1킬로미터 지점에서는 시민과 학생 수백명이 땅에 누워 수십 미터에 걸쳐 ‘인간 바리케이드’ 만들었지만, 전차는 감속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했습니다. 전차가 인간 바리케이드의 코앞까지 다가갔지만 시민과 학생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전차는 가까스로 속도를 줄였습니다.
당국은 군사용 최루탄을 사용할 것을 결정했고, 전차대는 장안가 서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시위대에게 발포하거나 군사용 최루탄을 발사했고 학생과 시민들을 전보대루(电报大楼) 서쪽으로 몰아가면서 전차의 일부가 육부구(六部口)에서, 나머지는 신화문 앞에서 일렬로 섰습니다. 당시 그곳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교기를 내걸고 톈안먼 광장에서 각 대학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전거 도로가 있는 서쪽을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전차대는 이들 학생들을 덮치기 위해 뒤에서 진격해왔지만 학생들은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제 때에 몸을 피하지 못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톈안먼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모임인 ‘톈안먼 어머니회’의 조사에 따르면 이 참극으로 14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학생이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우 씨의 책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 비참한 모습에 말을 잃었다. 비통한 외침이 울렸다.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학생들의 사체가 보행자 도로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 도로에서 2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에 있던 사체의 머리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는 마치 으깨진 두부처럼 뇌가 뭉개져 있었다. 그리고 뇌와 피가 섞여 1미터까지 분출한 흔적이 있었다. 보행자 도로 옆에는 4명의 사체가 있었는데, 그 중 2명 몸은 자전거에 박혀 부숴져 있었다.”
“살아난 학생 일부는 울면서도, 살해된 동료의 시신을 옮길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경계부대에 시신을 빼앗기고 학살의 흔적이 지워질 것을 우려했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학생들은 동료의 시신을 서쪽 장안가 골목으로 옮겼고, 한 소형 트럭 운전자가 5구의 시신을 정법대학까지 옮겼다. 그 중 1구는 자전거에 박혀 부숴진 학생이었다. 정법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 수천명이 트럭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변은 울음소리만 들렸을 뿐 아주 조용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는 “육부구의 참극은 톈안먼 사건의 잔학함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대학살을 지휘한 것은 뤄캉(罗刚)이라는 인물이고, 미친 듯이 인간을 내리누른 전차번호는 106이다. 뤄캉은 그 후 전차 제일사단부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내몽고군구 부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중국공산당 정권이 27년간 ‘6·4 톈안먼 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공포와 거짓말로 사람들을 세뇌한 결과, 많은 중국인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특히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6·4 톈안먼 사건’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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