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한자 ‘들을 청(聽)’의 자획(字劃)을 살펴보면 귀(耳)를 열고, 열 개의 눈(十+目)으로 주목하며, 상대와 마음을 하나(一+心)로 모으는 경청의 철학이 담겨 있다. 중국 역사에서 경청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당 태종과 위징(魏徵)의 일화를 소개한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위징전(魏徵傳)’, 그리고 당대의 정치 문답집인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따르면, 서기 628년(정관 2년) 당나라 제2대 황제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조정 안팎의 치우친 여론과 간신들의 정보 은폐를 염려하던 중 간의(諫議)의 직을 맡고 있던 위징에게 고충을 토로했다.
태종이 “짐(朕)이 어찌해야 총명한 군주가 되고, 어찌해야 정세에 어두워져 나라를 그르치게 되는가?”라고 묻자, 위징은 “겸청즉명 편신즉암(兼聽則明 偏信則暗)”이라고 진언(進言)했다.
“군주가 사방의 의견을 널리 구하여 들으면(兼聽) 영명(英明)해지나, 한쪽의 말만 치우쳐 믿으면(偏信) 간사한 무리가 군주를 기만하여 그 명철함을 가리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진(秦)나라 이세황제 호해(胡亥)는 환관 조고(趙高)의 말만을 독신(獨信)하다가 망국을 초래했고, 수(隋)나라 양제(煬帝) 역시 간신 우세기(虞世基)의 허위 상소에만 의존하다 파멸의 최후를 맞이했다.
위징은 본래 태종과 태자 자리를 두고 권력 암투를 벌였던 형 이건성(李建成)의 핵심 모신(謀臣)이자, 과거 태종의 제거를 도모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간직(諫職)에 중용했다. 위징은 조정에 머무는 동안 태종에게 200여 차례에 걸쳐 직간(直諫)했다.
태종은 자신과 대척점에 있던 옛 정적(政敵)의 직언(直言)까지 수용(兼聽)함으로써 정보의 왜곡과 편향을 막고,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이룩했다.
내 안의 고정관념을 씻어내고, 나와 다른 의견에도 귀를 열 수 있는 ‘겸청즉명’의 철학은 시대를 불문하고 소통과 리더십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짚어주는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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